공판일정을 받자마자 맨 위에 있는 죄목을 보고 의아했다.
'간첩방조죄'라는 듣기에도 생소한 죄목.. 소를 제기한 사람 중 두 명의 이름 앞에는 사망한 사람을 뜻하는 '망'자가 들어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온전한 이름이 들어있었다. 어떤 사건인가 싶어 법원 간사에게 물어봤지만, 선배도 이 사건은 잘 모르는 듯 했다. 혹시나 관련 사건이 나올까 싶어 망자의 이름을 인터넷에 쳐봤고, 딱 하나의 기사가 나왔다.
"심부름한 딸도 감옥에서 4년... 미친 법 아닙니까?"
삼척에 살고 있던 한 가족에게 1969년. 친척집에 갔다 온다던 김흥태 씨는 한국전쟁 때 죽은 줄 알았던 친척이라는 한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흥태 씨의 집에 며칠간 묵던 그는 홀연히 사라졌고, 1년 후 다시 흥태 씨의 집을 찾았다. 그의 이름은 김흥로. 1968년 삼척, 울진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들어온 남파공작원이다. 친척 중 한 명이 김흥로를 경찰에 신고했고, 군경이 출동해 흥태 씨의 집을 포위했다. 가족들이 자수를 권했지만 그는 결국 총으로 자살을 했다. 김흥태씨의 가족들은 경찰서에서 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못이겨 허위진술을 했고, 이로 인해 김흥로 씨와 김흥로 씨의 딸, 그리고 김흥로 씨의 동생이 징역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14살이었던 김흥로 씨의 아들과 당시 16살이었던 김흥로 씨의 딸은 이제는 머리 희끗한 노인이 됐다. 이날 강릉지원에서 진행된 재심 재판부는 김흥로의 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아직 1심이지만 김흥로 씨의 딸은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행여 자신의 죄목으로 자식들이 불이익을 받을까 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50여 년을 살아왔다고 한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간의 한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벌써 51년.. 김흥로 씨의 딸은 분가를 했지만, 김흥로 씨의 아내와 아들은 여전히 사건이 벌어졌던 그 마을에 살고 있다. 집 안에 들어서자 '국가유공자'라고 적힌 김흥로 씨 본인의 사진이 보였다. 6.25 전쟁의 공로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런 김흥로 씨가 '간첩방조죄'라는 죄목을 쓰고 있으니 웃길 노릇이다. 김흥로 씨는 이미 2004년 운명을 달리했다. 죽는 순간까지 "억울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흥로 씨의 아내는 일어서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많이 노쇠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집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니 놀란 눈치였고, 찾아온 이유를 설명을 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해, 천천히, 또박또박... 당시의 일을 기억하냐고 묻자, 김흥로 씨의 아내는 "검사에게 많이 맞았다"라고 답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순 없는 듯 했지만, 기억의 파편 조각들을 끄집어 내며 당시에 자신이 겪었던 고초를 조금씩 말해주었다. 그런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런 시대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김흥태가 숨었던 집은 2004년 물난리로 떠내려가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새로 지은 집이라고 했다. 당시 물난리로 모든 것이 떠내려가 가족 사진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혹시나 김흥로 씨의 사진이 없냐고 묻자, 안방에서 조그만 봉투를 꺼내왔다. 그 봉투엔 가족 행사 사진 몇 장과 20대, 30대의 김흥로 씨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 심한 수해에서도 그나마 건질 수 있는 사진은 모두 건진 것이라고 했다. 사진들은 가족들과 집에서 찍은 사진이 많았고, 외부 사람이 찍힌 사진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그들에겐 '간첩방조죄'라는 죄목이 수십 년을 옥죄어 온 족쇄와 같은 것이었으리라...
재심재판부는 김흥로 씨의 딸은 '무죄'를 선고했지만, 김흥로 씨와 김흥로 씨의 동생에 대해서는 원심의 형을 유지했다. 당시의 증거는 모두 사라졌지만, 며칠간 이어진 수사기록에서 진술이 일목요연하다는 게 이유였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폭력과 가혹행위가 있었다면 일목요연한 진술이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게 아닐까? 김흥로 씨의 가족은 나머지 가족들의 죄도 모두 벗겨질 수 있도록 항소한다고 했다. 기사에 적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방송인 탓에 많은 것을 적을 수 없던 아쉬운 재판이었다.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을 보다가 대사 하나가 무심코 내 귀에 들어왔다. 부자들이 큰 범죄에도 낮은 형량을 받은 것에 대해 '판사도 실수할 수 있다'고 극 중 판사역이 말하자, 주인공은 "판사들은 힘없고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한테만 실수하는 겁니까"라며 한 방 먹이는 것이다.
하지만 더 슬픈 것은 억울하고,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자신이 당하는 것이 '부조리'인 줄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도 모른 척 지나치는 것 역시 어찌 보면 범죄에 동조하는 것이 아닌가. 조금 더 세상을 들여다보고, 모른 척 지나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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